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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Nathan Lemon  on  Unsplash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안디옥에 거할 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안디옥에서 가르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비추어 볼 때, 명백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구약의 율법이나 규례, 그리고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그와 같은 가르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 몇 형제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명확한 정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된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통해서 볼 때 구원과 할례, 율법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 편에 서 있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신약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약만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끊임 없이 전하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비밀에 대해서 듣고 깨달아 구원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진리에 대한 부분도 지금과 같이 분명한 기준이 서 있던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구체적인 가르침은 그 사도들로부터 듣고 행하던 것이 일반적인 교회 섬김의 원리였을 것으로 보게 됩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능히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은 나면서 할례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할례가 구원의 선결조건이라 할찌라도 유대인들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또한 그 분께서 행하신 사실을 마음 가운데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방인은 이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로, 아무 조건 없이 은혜와 사랑을 베푼 자로 인정할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해졌음을 믿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더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로부터 1,300년 혹은 1,500년 전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지켜왔습니다. 그것을 이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왔습니다. 기록된대로, 베드로는 할례와 상관 없이 이방인의 구원을 지지합니다. (11) 더 나아가 베드로는, 그들(이방인)이 우리와 동일하게 믿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통해서 받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인정하고 우리(유대인)가 그들과 동일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할례는 구원과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또한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드러난 할례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을, 그리고 우리들(유대인)을 깨끗하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을 베드로는 증거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입니다. 베드로도 전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집에 보내시기 전 환상을 보이셨고 또한,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이방인들의 성령 받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침례를 주는 일들을 통해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에는 다른 것이 없음을, 오히려 유대인의 구원이 이방인의 구원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빈다.

 

이후에 야고보는 (19, 20)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즉 할례를 꼭 받아야 함을, 율법을 따라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고 말합니다. 야보고도 베드로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이라도, 작은 율법적인 요소라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고보는 몇 가지 요긴한,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하며, 다른 율법이 아닌 이방인의 교회에서도 우상,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할 것만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가 볼 때, 누가 틀렸다, 맞았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전 10 : 31)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 : 32, 33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의 유익이 아닌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각자의 생각이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가, 그 일이 교회에, 지역 모임에 어

 

려움을 주지는 않는가, 를 기준으로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의견대로 안디옥과 수리아 등 이방인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교회에도, 이방인 교회에도 합당한 결정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의견은 전에 안디옥 교회에 있었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과는 다른 의견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두 번째 전도여행을 가기 전,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야하는가, 에 대해서 의견이 갈립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 섭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의견이든,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한 나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바울이나 바나바의 의견 모두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마가를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서는 것이 옳은 것인지,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마가를 데려가기 위해서 바울과 다투고 갈라섰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도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고, 기뻐하실 선택인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모임 가운데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어려움을 주지 않도록 유의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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