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베스도 역시 사도 바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을 고소하던 유대인들도 그의 죄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사도 바울의 평소 행실을 살펴보게 됩니다. 바울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일을 감당했으나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스스로 일함으로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받아 여러 권세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에게서는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는 더이상 율법에 매인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에 합당치 않은 죄를 행하지 않았으며, 성전에서 행해야 하는 규례를 어기지도 않았으며, 가이사에게도 그랬고 그 당시 적용되는 로마 법을 범한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수요집회에 사무엘상 말씀을 교제할 때, 사울은 아버지께 순종했으며 주어진 작은 일에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자 했으며, 자신이 작은 자임을 겸손한 모습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에게 해가 될만한 일을,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질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서 어떤 흠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은 따로, 내 세상에서의 삶은 또 따로 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고 교회에 와서 회개의, 참회의,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서 원하는대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따라, 세상에서 당연시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육신 가운데 속한 이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달라지는 것은 죄를 범하느냐, 더이상 범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는 죄에 대한 생각이, 인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구원 받은 이후에는 죄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간증을 나타내는 것은 일상의 작은 여러 삶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벧전 2 :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벧전 2 : 15, 16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인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에 순복합니다. 그것이 합당하든, 그렇지 않든 순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자의 악행이나, 옳지 못한 행위가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을 막는 것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언행이 아닙니다. 선한 행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2.
(11, 12)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사도 바울은 베스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습니다. 베스도의 요청에 대해 단지 거절하는 것 뿐 아니라, 그가 더 요구합니다. 바로 가이사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이사에게 호소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행 23 :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에서도 주님의 일을 증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그 말씀을 의지함으로, 신뢰함으로 가이사 앞에 설 것을 호소한 것입니다.
행 26 :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만일 사도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면 그는 가이사랴에서 그대로 풀려났을지 모릅니다. 자유롭게 다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이사에게 가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로마로 가서 증거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다른 모든 상황은 로마로 가는 것이 불리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오직 단 하나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결정의 근거가 되는 것 역시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정황, 느낌, 감정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27) For it seemeth to me unreasonable to send a prisoner, and not withal to signify the crimes laid against him
베스도가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을 가이사 앞에 보내는 것은 비합리적인, 비이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이사 앞에서 심문을 받을 만한 죄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가이사 앞으로 보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나, 죄인의 신 분으로 로마까지 사도 바울을 보내십니다. 주님의 일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 뿐 아니라, 성도들의 생각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길은 세상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보다 높으며 깊습니다. (사 55 : 9) 오늘날도 여러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며 성취하십니다.
'Quiet Time 경건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26장 (2)) 사도 바울이 선택한 고난 (0) | 2020.01.10 |
---|---|
(사도행전 26장 (1))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 (0) | 2020.01.09 |
(사도행전 24장)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는 것 (0) | 2020.01.02 |
(사도행전 23장) 주님의 위로와 주님의 본 (0) | 2020.01.01 |
(사도행전 22장) 사도 바울의 구원 간증 (0) | 2019.12.31 |